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몽 아롱 (문단 편집) == 생애 == 레몽 아롱은 [[장폴 사르트르]]와 같이 1905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동일하게[* 또한 폴 니장, [[조르주 캉길렘]] 역시 같은 교우였다.] 1924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두 사람 다 철학을 선택했다. 1930년대에는 두 사람 다 독일에 머무르면서 철학을 연구했다.[* 당시 먼저 독일에 가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던 아롱은 사르트르에게 같이 공부하기를 권했고 사르트르도 역시 독일로 건너가게 된다.] 1939년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사르트르가 파리에 머무를 때, 아롱은 [[드골]] 장군을 따라 런던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1940년 6월, [[마지노선]]만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을 피해 다른 국경으로 침략한 나치 독일이 전쟁 6주만에 파리를 점령해오자 프랑스의 1차세계대전 영웅인 [[페탱]]은 휴전파의 중심에 섰다. 지금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다 여기고 나치독일과 휴전을 맺고 프랑스 남부 도시 비시(Vichy)를 중심으로한 친독일성향의 프랑스를 세운다. 이를 [[비시 프랑스]]라 부른다. 반면 페탱의 부관이었던 드골 장군은 항전파에 섰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를 세우니 이를 [[자유 프랑스]]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공산주의자, 좌파들은 드골을 권위적인 보수우익이라 여겼기에 그를 따라 자유 프랑스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아롱은 2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하였고 패전 후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아롱은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라는 잡지의 편집장(주필)이 되었다. 1945년, 사르트르와 아롱은 ‘현대(Les Temps modernes)’라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둘은 곧 결별한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마르크스주의]]가 압도하는 시기였지만 아롱은 이에 동화되지 않고 주변인으로 남아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다. 특히 1947년에는 일간지인 ‘르 [[피가로]]'[* 아롱은 1947년부터 시작하여 말년인 1977년까지 꾸준히 르 피가로에 영향력있는 칼럼들을 썼다. 이후에는 주간지인 렉스프레스(L'experss)지에서 컬럼을 썼다.]의 논설위원이 되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여하였다. 아롱은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 후 펴낸 논문 중의 하나가 ‘역사철학 서론(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 (1938)이다. 정통한 논객으로서 그는 소련을 철저하게 비판하였고 1948년에는 '대분열'(Le Grand schisme)이라는 책에서 그는 전 세계가 미국의 자본진영과 소련의 사회진영으로 크게 둘로 나뉘게 되면서 소위 냉전이 도래하자 이 냉전의 쟁점들에 대해 큰 통찰력 있는 해석을 보였고 스탈린 치하 소련의 모순된 모습을 서술하였다. 아롱은 1955년 ‘지식인의 아편’(L'Opium des Intellectuels)이라는 저작에서 도출해낸 분석을 통해 공산주의를 ‘세속화된 종교(religion séculière)’로 정의하였다. 또한 공산주의는 지식인들 중에서도 자격지심(mauvaise conscience)이 있는 지식인을 잘 ‘유혹(séduction)’한다고 하였다.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의 제목은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La religion est l'opium du peuple.)’라는 문구를 대놓고 변형시켜 인용한 것이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심한 비판을 가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저지른 억압,학살,비관용에 대해서는 방어에 급급하다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아롱은 ‘증거들(Preuves)’이라는 잡지에 특히 정성을 쏟았는데 이 잡지는 미국에 의해 운영되는 ‘문화적 자유를 위한 회의(le Congrès pour la liberté de la culture)[* 전 세계 여러곳에 반공을 목표로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CCF이 설치되었는데 애초부터 미 CIA를 통해 재정지원이 들어갔음이 1966년에 공개되었다.](1950)’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 ‘증거들’이라는 잡지는 당대의 모든 [[전체주의]](totalitarisme)[*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 국가와 같은 전체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야 함을 주장하는 정치 사상 및 체제. 극단적 민족주의, 파시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이즘, 북한주체사상 등을 들 수 있다.]에 반대하면서 리버럴한 사상의 부흥을 위한 플랫폼을 자처하였다. 이 잡지의 이론적 분석들은 동유럽 현장취재 기사들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당시 소련 영향권 하의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실제 상황들에 대한 ‘증거들’을 취재하여 보이면서 풀어나가는 관점을 견지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잡지 '증거들(Preuves)'는 공산주의를 정면에서 반대해오던 기조를 벗어나 당시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프랑스 내에서 대두되기 시작하던 소비사회(society of Comsumption/ la société de consommation)로의 변화에 대한 이슈를 평하는, 좀 더 이론적인 기사를 쓰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55년에 소르본느 대학 교수로 임명(논란이 없진 않았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좌파들에 의해 악마처럼 묘사되는 바람에 이 때 이후부터 60년대 말까지 아롱의 지지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프랑스 최고권위의 교육기관이자 연구기관인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그의 메시지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마르크스주의가 파열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새로운 젊은 세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아롱의 분석들이 높이 재평가받게 되었다. 사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오랜동안 [[자유주의]](libéralisme) 전통에 대해 혐오해왔다. 자유주의는 봉건귀족 및 전제왕정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사상적 무기가 되어 근대 이후 서구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념)에 대항하여 등장한 이념인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주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탈린 소련 등 공산주의 정권들의 정의롭지 못한 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소위 "반[[전체주의]][* 전체주의란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의 공산주의, 파시즘, 일본군국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민족주의 등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일체의 사상이다. [[하이에크]]는 우익도 좌익도 언뜻 반대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전체주의라고 하였다.]운동(Anti-Totalitarian Movement)"이 일어난 뒤부터 이러한 분위기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 말년에 이르러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아롱의 말년의 이러한 대접 변화는 그의 사상적 파워에서 온 면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더 이상 젊은 신진 지식인들을 사로잡지 못하게 된 면이 더 큰 원인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지식인층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변화는 전세계적으로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제3세계의 학자,학생,지도자들로 하여금 영미권 정치사상(Anglo-American political thought)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대안(alternatives)을 찾기위해 더 이상 예전과 같이 프랑스를 주목하진 않게된 면이 있다. 아롱의 저서와 사상은 국제관계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균형된 시각과 통찰력을 갖추기위해 여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1983년, 아롱은 자신의 친구인 철학자 베르뜨랑 드 쥬브넬(Bertrand de Jouvenel)[* [[프리드리히 하이에크#s-5|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초기 멤버 중 한 명]을 위해, 프랑스를 파시즘의 요람으로 지목한 이스라엘 역사학자 스테른헬(Zeev Sternhell, 1935-2020)의 일련의 서적과 관련된 명예훼손 소송에서 증언을 해주기위해 파리 법정에 참석하였고 스테른헬의 저서를 가장 비역사적인 저서라고 진술을 마친 후 법정 계단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32년 데카드 드 퐁티니(Décades de Pontigny)라는 10일간의 지식인들 초청세미나에서 만난 2살 연하의 쉬잔 고숑(Suzanne Gauchon)(1907-1998)과 1933년에 결혼, 슬하에 딸 셋을 두었다. 딸 중 한 명인 도미니크 아롱(Dominique Aron)은 사회학자이자 현직 정치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